Kim dae hong

어쩌면 말이야 그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싶었을 거야
2019-11-26 ~ 2019-12-10

김대홍 작가는 지금은 베트남 고산마을에 지내며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로봇, 설치, 뉴미디어 그리고 회화 등의 다양한 매체를 다루는 작가이다. 그의 작품은 장르를 불문하고 웃음과
슬픔 사이 어디쯤에 머물며 미생의 삶을 블랙유머로 이야기하는 공통점이 있다.
보는 이로 하여금 대상에 대한 웃음과 함께 그 너머의 비애를 동시에, 즉 "웃프다(우스우면서도 슬프다)"라는
감정을 느끼게 만든다.
이번 전시에서는 10여점의 페인팅과 함께 섬세한 펜화작업을 새롭게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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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의 생애사 - 김만석] 중 발췌


인간을 지탱하는 관념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을 훌쩍 비켜나서 걸을 줄 안다. 오히려 슬픔과 고통에 잠긴 인간이 할 수 없는 우정을 나눌 줄 알고, 어두운 곳을 밝혀줄줄 아는 눈이 세계를 따스하게 감싸는 빛을 발하기도 한다. 물론 김대홍의 로봇은 인간들이 겪는 생애사의 바깥에 놓여 있는 초월적인 이미지로 제시되는 것은 아니다. 로봇도 늙는다. 실제로 이전 작업에서 늙은 로봇 이미지가 등장한 적도 있다. 달리 말해, 김대홍의 로봇은 인간들을 비참하게 만드는 갖은 체제들 내부에 소속되어 있으면서도 이 세계 안에서 로봇으로 살아가는 법을 체득하고 구성하려고 한다. 김대홍의 로봇에게 삶의 의미를 실현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빛’이다. 인간 형상의 인물의 목적 없이 배회하고 길을 떠난다면 로봇은 ‘빛’을 (지)향한다. 마치 미술이 ‘빛’이라는 무의식적 기반 속에서 시각성을 구현하는 것처럼 김대홍의 로봇은 다만 ‘빛’이 있는 곳으로 나아간다. 그것이 무엇이 될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말이다.

무엇보다 작가를 닮은 인간 형상은 한 명 뿐이지만, 로봇은 차이를 갖되 차별되지 않는 무수한 로봇 동료가 있다는 점에서 양자의 존재론적 위치가 다르다. 더군다나 인간과 로봇이 더 이상 분별되기 어렵다고 해도, 인간 형상 자체가 갖는 지위는 여전히 로봇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달리 말해, 인간을 중심화하는 가치 체계의 질서에서는 위계가 형성되기 쉽고 차이를 차별로 전도하는 일이 흔하지만, 로봇에게는 각자의 차이만이 형상적으로 구분될 뿐 서열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요컨대 인간 형상이 개체를 중심화한다면 로봇 형상은 공통성을 중핵으로 삼는다. 온갖 사회적 부정성(우울, 슬픔, 고통, 상처 등)으로 비롯되는 공통성은 물론이거니와 이러한 부정성을 거스르거나 타인과 우정을 나눌 수 있으며 함께 길을 걷거나 위로와 위무를 나눌 수 있는 힘을 공통성으로 동시에 갖는다. 로봇은 그런 점에서 하나이지만 여럿이다. 심지어 이렇게 말해도 좋다. 홀로 있는 그 순간에도 로봇은 함께 하고 있다는 점에서 외로움도 가뿐하다고.